최근 이슈가 되는 한 사건에 대하여
나무 한 그루를 떠올려보자. 뿌리를 따라 곧게 지면에서 수직으로 올라온 모습과, 양 옆으로 뻗은 가지들. 그 가지들을 따라 펼쳐진 잎사귀들과, 간간히 보이는 열매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나무 한 그루의 가지 하나를 가지고 나무라 칭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열매 하나를 가지고, 잎사귀 하나를 가지고 나무라 칭하지도 않는다. 뿌리를 따라 곧게 지면에서 수직으로 올라온 몸뚱이 하나를 가지고 나무라고 칭하지도 않는다. 나무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 개념 상에서 개별적으로 분해할 수 있는 여지를 함축하고 있다.
‘사건’ 이라는 것이 그렇다. 하나의 큰 사건이 있다면, 그 큰 사건을 이루는 개별적인 사건들이 존재한다. 이 둘은 상보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개별적인 사건을 부재한다면, 큰 사건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역으로, 큰 사건이 부재한다면, 이 개별적인 사건들은 큰 사건의 개별적인 사건들이라는 개념성을 상실한다.
법에서 다루는 사건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피해자’와 ‘피의자’라는 대립관계를 구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피해자와 피의자에 대한 지칭성이 ‘법에서 다루는 사건’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그 당위성을 확보한다는 점에는 문제를 제기할 부분이 없다. 다만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큰 사건의 피해자, 피의자와 개별 사건들 각각의 피해자, 피의자는 꼭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법의 심판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개별사건들을 각각 검토하는 판례들도 있는 관계로, 이는 논외의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제기하고 싶은 문제점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사회적 인지라는 부분이다. 뻔한 얘기지만, 무분별한 정보들이 범람하는 사회라는 배경 하에서 가장 자극적인 부분에 먼저 사회적 반응이 시작된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다만, 그 수준에서 판단의 사고가 멈춰버린다는 것은 그 자극적인 정보가 일방적으로 수용된 상태에서 판단이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즉, 사회적 판단이라는 권리가 어떤 특정한 정보제공자에게 완전히 이양된다는 것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덤불 숲’에서는 하나의 사건과 개별 증언들이 등장한다. 이 개별 증언들이 묘사하는 사건은 각기 다르며, 어떤 증언이 진실된 사건을 묘사하는 것인지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만약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판단이라는 권리가 어떤 특정한 정보제공자에게 완전히 이양된 상황이라면, 이 개별 증언들 중 가장 자극적인 것, 아니면 가장 노출이 많이 된 것과 같은 사건 판단과는 무관한 이유를 통해 특정의 개별 증언이 지지를 받게 될 것이고, 결국 사회적 판단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큰 사건에서의 피해자가 피해자로서, 피의자가 피의자로서 그에 합당한 결론에, 그리고 그에 합당한 처우에 직면하는 것은 이견이 없는 사항이다. 다만, 개별사건에서의 피해자와 피의자가 그와 일치하지 않다면, 그에 합당한 결론과, 그에 합당한 처우는 큰 사건과는 다른 케이스로서 고려가 되야 한다는 점이다. 그 무엇보다도 당신들이 말하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그게 고려되야 한다는 것이 내가 이 글을 쓴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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