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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The Wailing, 2016) 리뷰

Cogitation/Film Review

by Mr. Lazy 2020. 6. 2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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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곡성 만큼이나 개봉 이후 온갖 해석들이 넘쳐나면서 온라인/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시끌시끌해졌던 영화가 국내에 있었을까 싶다. ‘절대 현혹되지 말라’고 나홍진 감독이 영화 포스터에 넣어둔 문구가 모두를 현혹시키는 재밌는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고.. 사실 누가 절대 현혹되지 말라는 주의 문구가 현혹시키는 대형 미끼였으리라 단순히 생각할 수 있을까? 이건 마치 Warning 이라는 문구가 붙은 위험물 앞에서 Warning 이라는 문구가 제일 위험한 격이니.. 사실 영화만 놓고 본다면 그냥 재밌게 볼만한 영화 정도였지만, 최근 다시금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관객의 문전에 던져놓은 그 미끼와 그것에 현혹당하는 모습들을 보니 떠오르는 것들이 생겨서 리뷰를 남겨보기로 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며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장 37절-39절)’ 이라는 예수가 부활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 했다는 말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무속인, 굿, 살이 나오며 양이삼이라는 카톨릭 부제가 등장하는 등, 영화 자체가 종교적인 색채라는 것을 품고 있는 것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저 성경의 문구가 그 종교적인 상징성을 영화에 부여하기 위해 인트로에 삽입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되려 ‘성경에 나오는 문구’가 아닌 그냥 모르는 이가 화장실 문에 낙서로 적어놓은 ‘문구’ 정도로 생각하면 좀 더 글 자체로 해석이 가능하려나? 하지만 성경 구절이라는 의미에 의해 이미 현혹은 시작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 현혹을 위해서 굳이 성경 구절을 택한 것이 아닐까?

 영화의 스토리는 복잡하다. 전라남도 곡성의 지구대에서 근무하는 경찰 종구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으로 보이는) 사건을 수사하던 중에 일본에서 온 외지인 하나가 마을에 오면서부터 이상한 사건들이 발생한다는 얘기를 동료 성복에게 듣는데, 이후 사건을 목격했다고 말하는 무명과 함께 현장을 둘러보다가 그 외지인과 계속 마주하면 피를 말려 죽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그 후부터 종구의 딸 효진이 아프기 시작하는데, 종구는 그 일본인의 집을 수사하던 중 죽은 마을 사람들의 생전 모습과 죽은 모습이 찍힌 사진들을 발견하고, 효진의 이름이 적힌 실내화까지 발견하게 된다. 외지인에 의해 효진이 이상해진 것이라는 의심이 확신이 된 듯 부제 양이삼과 함께 그를 찾아가 곡괭이로 그의 집을 한바탕 뒤집어 놓지만, 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어 효진이 옆집 할머니를 손가위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하고, 종구는 그 길로 무속인 일광을 고용하여 굿을 하게 된다. 괴로워하는 효진의 모습을 보며 종구가 굿판을 뒤집어버리기 전까지.

 이제 영화는 클라이막스로 향한다. 종구는 외지인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의 집으로 무기를 들고 찾아간다. 외지인은 종구에게 쫓겨 절벽 끝에 매달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지만, 결국 무명에게 추격당하고 돌아가는 종구 일행의 트럭 위로 시체가 되어 떨어진다. 시체를 가드레일 밖으로 던져버리고 효진에게 돌아온 종구는 효진이 완치된 모습을 보이는 것에 안도하며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일광은 쌀점을 보다 새로운 점을 본 듯 종구에게 급히 가지만 무명에게 저지 당하고, 갑작스레 효진이 갑작스레 사라진 상황에서 종구는 무명과 마주한다. 일광은 종구에게 무명을 믿지 말라하고, 무명은 종구에게 닭이 3번 운 후에 집 안으로 들어가라 한다. 종구는 일광을 믿기로 하고 집으로 들어가버리고, 효진을 제외한 일가족이 죽은 광경을 목격한다. 멘탈이 나가 웅얼거리는 종구와 효친과 종구가 놀이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교차되며 영화는 그렇게 끝이난다.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 상 몇가지의 얽힌 대상들과 완전히 뚜렷하지만은 않게 보여주는 것,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대화 들을 통해서 영화는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며, 이는 나홍진 감독이 인터뷰에 밝혔듯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마치 대학교 때 하던 ‘개, 고양이’라는 바보게임을 하면서 나는 비밀을 알고, 남들은 비밀을 모른다는 점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즐기려는 듯이 말이다. 중요한 점은 영화는 포스터부터 관객들을 현혹했고, 스크린에서도 관객들을 현혹했으며, 아직까지도 관객들을 현혹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하나의 큰 현혹 덩어리다.

 영화의 제목은 곡성으로 ‘누군가가 죽었을 때 소리내어 우는 소리’를 의미하며, 영문 제목 명은 The Wailing이다. 사과를 그려놓고 사과라고 제목을 붙이는 고전 회화적 방식을 이용하자면 이 영화는 말 그대로 누군가 죽는, 그리고 누군가 죽는 사람에 의해 소리내어 우는 사람이 있는, 곡성이 나오는 영화란거다. 다만, 포스터에서부터 말하는 ‘절대 현혹되지 말라’는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현혹되지 않기 위해 머리를 복잡하게 굴린다. 그렇게 숨겨진 내막은 무엇인지, 일광과 외지인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무명은 선인지 악인지, 환각버섯의 역할은 무엇인지, 금어초의 상징은 무엇인지 등등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현혹의 함정에 깊이 빠져들어간다. 결국 곡성이 나오는 사건이라는 영화의 큰 틀은 이 자질구레한, 현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장치들을 해석하는 생각의 찌꺼기들에 의해 가려진다.

 사실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은 플라톤에서부터 정리되었던 것이기도 하고, 정치의 발전과 더불어 우려지고 우려질 정도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런 긴 역사를 가진 장치가 아직까지도 잘 먹히는 이유는 관점의 한계라는 것에서 발생한다. 크게 보자면 곡성에서는 일광과 외지인을 묶은 시뮬라크라 A와 무명이라는 시뮬라크라 B가 존재하는데, 이 두개의 시뮬라크라가 특별하게 어느 한쪽이 곡성을 만들어냈는지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는 설계에 의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 시뮬라크라 끼리의 대립만이 남게 되버린다. 곡성이 개봉된 후 술집에서 무명이 선인지 악인지, 외지인이 선인지 악인지 번화가 술집마다 심심치 않게 들렸던 것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이 A와 B의 대립과 그 대립에 의한 저지전략에 의해 효진과 종구를 제외한 일가족이 살해당한 시뮬라크라 C, 그리고 종구 가족을 제외하고도 여러 차례 발생한 비극들의 시뮬라크라는 모두 잊혀져버린다.

 재밌는 점은 이 영화와 시뮬라크라의 저지전략이라는 것이 현상황에도 시사할 점이 많다는 점이다. 지난 3년 간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지지하는 인물에 따라, 반일에 대한 관점에 따라, 친미에 대한 관점에 따라,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시뮬라크라를 지지하며, 정말 어느때보다도 거칠게 서로 대립을 하고 있다. 그리고 참 인간적이게도 본인이 지지하는 시뮬라크라가 선임을, 참임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들 있다. 정작 나라는 망조를 향해 달리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 곡성의 효진이가 영화에서 당신들에게 큰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던가.

‘뭣이 중헌디!!!!’

정신 좀 차리자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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