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뭇한 기억이지만 대학 시절 즈음 홍대에서 같이 밴드를 하던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다 우스갯소리로 어쩌면 지금 태어난 아이들은 우리 나이가 되었을 때 The Beatles도 모르는 세대가 될 수도 있다는 가설과 함께 소름이 돋았던 적이 있었다. Pink Floyd를 모른다면 그럭저럭 이해는 하겠지만, The Beatles를 모르는 세대라니.. 소련도 그럴 것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와 함께 마치 민주주의의 주적으로 교육받았던 소련, 그리고 그 해체.. 나도 어렸을 적 일이라 어렴풋하지만, 그때 당시 내 나이 즈음인 지금의 아이들은 소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기라도 했을까. 마틴 스콜세지의 The Irishman도 이런 어렴풋한 기억이라는 것을 담는다. 그리고 그 어렴풋함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메시지라는 점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했다.
영화는 찰스 브랜드의 ‘I Heard You Paint Houses’라는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딱 봐도 마틴 스콜세지의 작품 답게 미국의 마피아 조직과, 이민자들을 주축으로 스토리를 풀어간다. 현재까지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는 ‘지미 호파 실종사건’을 다룬 영화로, 실제 사건은 미국의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지미 호파가 1975년 7월 30일 디트로이트에서 행방불명되어, 1982년 사망처리되고, 현재까지도 정확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지 않은 채 온갖 음로론과 루머만 난무하게 되는 사건이다. 영화는 아일랜드계의 이주민인 프랭크 시런을 직접적으로 지미 호파 실종사건에 개입시키며, 프랭크 시런이 고작 고기 정도 빼돌리는 트럭 운전수에서 이탈리아계 마피아 러셀의 주요 부하, 그리고 결국 러셀의 명령으로 지미 호파를 암살하게 되는 House Painter가 되는 과정과 해당 사건이 종료된 후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한 명의 노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들을 보여준다.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그리고 은퇴를 했었다가 스콜세지의 집요한 권유로 합류하게 된 조 페시, 하비 카이텔 등등 이미 출연진 만으로도 화려한 이유도 있겠지만, 복잡하게 시간을 나열하며 풀어가는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몰입감도 상당하며, 큰 축이 되는 사건과의 개연성에서도 벗어나는 부분이 없어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에도 전혀 문제는 없다. 다만, 긴 런닝타임이 집중력에 지장을 줄 수는 있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209분이라는 시간이 허비되는 구석은 없다.
우선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마틴 스콜세지라는 감독에 대해 얘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족에서 태어난 감독으로, 현시대의 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이자, 영화광이며, 특히나 2019년 10월 3일 마블 영화에 대해 ‘Cinema가 아닌 테마파크이다’라는 소위 ‘마블 까기’를 통해 영화계의 논쟁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틴 스콜세지가 표현하는 Cinema와 Movie라는 단어 사이에 의미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인데,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Movie라는 것은 특정한 표현형식, 곧 영상 자체를 의미함에 가깝고, Cinema라는 단어는 그 영상을 활용한 예술에 가깝다. 이는 마치 미대 입시생이 그린 아그리파 데셍을 잘 그린 그림이라고 표현해도, 예술이라고 표현하지는 앉는 차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의 필모그래피의 시작은 1967년으로 무성영화의 시대부터는 아니지만, 사실 근대영화부터 현대 CG가 넘쳐나는 현시대까지 그 변화의 현장을 몸으로 겪어왔던 인물이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변화에도 고집불통으로 클래식 기법만을 추구했던 사람이 아닌, 주요한 혁신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과정 속에서 Movie가 잃어가는 Cinema적인 속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마블의 예를 통해 표현하려 했던 것 같다.
사실 사진과 영상이라는 매체는 예술계의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원동력이었는데, 발터 벤야민 이후 예술이 현실을 복제하거나, 단순히 아름다움을 주는 것에서 넘어서는 것을 논의했다는 부분이 대표적이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상식적으로 사진과 영상이라는 기술 이후에 현실을 굳이 붓질을 통해 캔버스에 옮겨놓거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죽치고 앉아 그릴 필요가 없었겠지.)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가 보여준 첫 영화는 단순이 현실을 복제하거나,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경험을 관람자들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사실 뤼미에르 형제는 이런 부분에 대해 인지했을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여기서 Cinema라는 개념이 튀어나온다. 단순한 현실 복제와 아름다움을 넘어선,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주는 경이. 이는 마틴 스콜세지가 Cinema를 주장하며, 영화에서의 과학 기술 활용에 적극적이었던 것을 이유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런 과학 기술의 활용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이 경이라는 부분에 집중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경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어렴풋해진다. 터미네이터 2에서 샷건에 맞아도 잠시 흠집만 생겼다가 회복하며 추격을 하는 T-1000을 보며 느꼈던 공포감이라는 것은, 승용차에서 변신을 하며 도시를 파괴하는 트랜스포머를 보며 느끼는 그 느낌과는 다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데이브에게 두려움을 호소하는 HAL 9000을 보며 느꼈던 소름은, 매일 삽질을 해대는 Siri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는 다르다. 이 둘 사이에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으며, 그 사이에 생긴 ‘익숙해짐’이라는 것이 있고, 새로운 감각을 통해 우리가 느꼈던 경이에 대한 어렴풋해짐 이라는 것이 있다. 마치 어렴풋해지는 소련이라는 단어에 대한 연상작용과 같은, Beatles가 어렴풋해지는 세대의 흐름과 같은..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 어렴풋해진 지미 호파 실종사건과 같은..
마틴 스콜세지가 The Irishman을 통해 표현하고자 함은 이 어렴풋해지는 것들.. 특히나 어렴풋해지는 Cinema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며, 그 Cinema라는 가치에 본인이 평생을 바쳐왔음을 프랭크 시런의 등장을 통해 보여주기도 하며, Cinema라는 가치를 이어가는 계승자를 갈구하는 그의 바램이기도 하다. 특히 마지막 요양병원에서의 장면에서 프랭크 시런이 머무르는 방은 Cinema를, 그리고 그 안에서 고독하게 있는 프랭크 시런은 마틴 스콜세지 본인을 상징하며, 살짝 열린 문은 그 계승자에 대한 그의 바램을 상징한다. 그의 질문은 다다이즘을 기점으로 예술계에 다시금 찾아온 근원적 질문인 ‘예술은 무엇인가?’를 넘어선, ‘당신은 예술을 계승할 것인가, 예술을 어렴풋한 기억 속으로 보낼 것인가?’ 라는 아주 명확한 질문인 것이다.
2019년 정말 대단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는 할리우드에 대한 실체를 타란티노 식의 유머코드로 풀어냈고, The Irishman은 Cinema라는 가치의 어렴풋해짐에 대한 스콜세지의 향수와 경각심을, 그리고 기생충은 관조적인 시각으로 풀어낸 현시대 계급 간 삶의 방식에 대한 표현이었다. 만약 오스카가 MOMA 였다면, The Irishman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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