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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Parasite, 2019) 리뷰

Cogitation/Film Review

by Mr. Lazy 2020. 5. 1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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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언더도그마 적인 프레임에 의해 해석되는 영화, 문학 등의 컨텐츠들은 듣고 보면 그럴싸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좀 더 깊이를 가지고 그 내부를 뒤집어 마치 잘 익은 사과 껍질 안에 들어있는 썩은 귤껍질을 발견한다면, 이 언더도그마 적 프레임이 얼마나 큰 시대정신이 되어버렸는지를 실감하기도 한다. (이것은 언더도그마에 대한 표현이 아닌 영화, 문학 등을 굳이 언더도그마에 끼워 맞춰 해석하는 경우에 적용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영화, 문학 등이 애초에 그것을 목적성에 두었다면, 이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구조적으로 언더도그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에 기인할 것이고, 어쩌면 여지껏 언더도그마에 맞춰진 각본들이 그 절대 다수에 호응을 얻어 대중문화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이전 작 중 설국열차에서도 이런 언더도그마 적으로 오인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았다. 수평으로 나뉘어진 위계구조, 언더도그들의 수평간 이동을 통한 오버도그 전복, 그 안에서 찾아내는 언더도그와 오버도그 간의 긴밀한 협상, 그리고 정치. 마지막 폭발로 모든 구조가 탈구조가 되며, 다시 리셋이 되버리는 열린(하지만 희망적일 것으로 생각되는 복선들을 담고있는) 결말. 여기서 언더도그마 적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부분은, 체제 유지를 위한 언더도그와 오버도그 간의 긴밀한 협상을 발견하는 부분에서 이미 벗겨지는 껍질이지만, 언더도그마의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이 벗겨진 부분을 보는 것조차 눈뜬 장님처럼 거부하는 것 같다. 사실 설국열차의 경우에는 구조의 비유라던가, 그 안의 위계 구조 간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에 의한 전개 등으로 봤을 때 상당히 직역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기에, 이 언더도그마적 프레임을 넘어 보는 것이 어떤 면에서 더 어렵게 보일 것 같기도 하다. 특히나 이 갈등에 의한 전개 부분이 작 중 팔할 이상이니, 이미 왈가왈부할 부분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생충에서는 이 팔할 이상을 차지했던 갈등에 의한 전개 부분이 거의 없다시피 하며, 설국열차와 같은 위계구조가 뻔히 보이는 수평이 아닌, 보이지 않는 수직 구조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열차의 칸과 칸이 연결되어있는 것과는 다르게 위계구조 간의 연결이라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이 연결은 몇몇 기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하기도 하다. (예를 들면, 동익의 집에 기우가 과외선생으로 들어간 것은 민혁의 유학으로 인해 대체 교사를 ‘소개’하는 우연한 기회를 통함이었고, 이 소개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동익의 집에 이방인인 기우가 들어갈 일은 없었다는 부분을 보여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언더도그마적 프레임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겠지만) 이 뻔히 보이는 위계 구조라는 것을 뒤집을 방법이나, 시도는 없어보인다, 그리고 그 위계 구조에 대한 갈등의 명분이라는 것도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수직으로 나뉜 위계 구조 간의 다른 삶의 방식, 서로 다르게 공유하는 가치관 등 아비투스 만을 제공할 뿐이다. 일반적이라면 당연하겠지만, 영화 상 등장하는 언더도그는 오버도그를 준거집단으로 삼고 있으며, 그 오버도그의 아비투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그에 대한 왜곡을 하기도 한다. 착해서 돈이 많은게 아니라, 돈이 많아서 착한 것이라는 충숙의 대사를 보면, 착한 것은 오버도그의 아비투스라 언더도그에게 보여지는 아비투스 이며, 이는 언더도그에게는 준거집단의 아비투스가 되버리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를 단순히 제공할 뿐, 이에 대한 갈등을 그려내지는 않는다. 이는 마치 프로그래밍 상 디폴트 값처럼 고정되있는 상태일 뿐, 사고의 시작점이 되는 부분은 아니다.

갈등의 시작은 수평 상에서 벌어진다. 문광의 정체와 지하실, 그리고 지하실에 거주하는 근세. 기생충이라는 영화 제목을 관통하듯, 영화 상에서 보여주는 언더도그들은 동익의 가족이라는 오버도그에게 기생하여 살아가는 집단이다. 이는 마치 영국의 귀족이 하인을 고용하는 것이 단순히 하인을 부리기 위함을 넘어, 사회 고용률을 높이고, 일정부분 부의 분배를 통해 그들에게도 ‘생존’의 수단을 제공하는 취지를 가진다는 체제유지 정당화를 뒷받침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기생은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닌, 그저 삶의 방식일 뿐이며, 언더도그의 아비투스로 그려진다. 그들의 아비투스라는 것이 관통하는 개념은 바로 이 ‘생존’이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생존이란 부분을 관통하기에 서로 같은 숙주에 기생하는 언더도그들은 필연적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갈등은 기택의 가족이 숙주에 대한 독점적인 기생을 위해 숙주와의 연결을 끊어버린 언더도그가 몇몇 등장한다. 운전수가 그러했고, 문광이 그러했다. 공존이라는 것은 생존이라는 아비투스를 고려하는 언더도그에게는 격한 사치인 것이다. 그렇게 수평구조 간의 갈등이 지나가며 비가 내리고, 이 비라는 소재는 오버도그에게는 자녀의 캠핑을 위한 도구가 되고, 언더도그에게는 생계를 위협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아비투스 일 뿐이다. 이를 긍정, 혹은 부정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언더도그마적 퍼즐의 발악일 뿐이다.

사실 영화의 전개 상 가장 해석이 애매한 부분은 기택이 동익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사실 일반적으로 기택에게 난다는 ‘냄새’라는 부분이 차별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 냄새라는 장치는 차별을 상징하는 것 이라기 보다는 서로 뒤바뀔 수 없는 오버도그와 언더도그 간의 선을 보여주는 장치일 뿐이다. 마치 당신의 집과 이웃의 집 사이가 현관문 두개를 기점으로 구분을 두고있는 것과 같이. 동익과 연교가 수군거리며 기택의 냄새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것이 누군가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이다. 동익과 연교가 마냥 좋은 얘기를 하기만을 기대했다면, 이는 위에서 얘기했던 것은 오버도그의 아비투스라 언더도그에게 보여지는 아비투스의 연장선일 뿐이다. 기택이 동익을 살해하는 부분은, 위계구조 상의 이동이 불가함을 느낀 언더도그의 최후 발악일 수도 있으며, 기택이 온전한 기생충이 되어 지하실에 입실하게 되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영화의 전개를 위한 장치일 뿐이지, 이것 자체가 어떤 상징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은 지나친 해석일 것 같다.

추가적으로 영화에서는 이 ‘상징’이라는 것에 대한 의미부여를 은연 중에 거부하기도 하는데, 기우가 자주 얘기하는 ‘굉장히 상징적이네요’ 라는 부분이 그를 보여준다. 상징이라는 것은 어떤 본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부여한 기표와 기의에 의해 존재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기우는 수석이라는 대상에 이 상징성을 부여하는데, 수석을 통해 위계구조의 상승을 꾀하는 기우의 공상과 그 바램이 상징화된 수석에 담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몸싸움의 과정에서 기우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것은 이 상징화된 수석이다. 결국 수석은 자연의 상태로 돌아간다. 마치 사회의 위계구조가 자연의 상태와 같이 원초적인 구조인 것처럼.

관조적인 시각으로 풀어내는 기생충이라는 영화에 언더도그마적 해석으로 의미부여하는 것은 무리한 퍼즐 맞추기와 같다. 그리고 언더도그마적 시대정신의 주춧돌이 도덕이라는 관념이라면, 기생충의 정당성에 대한 걸림돌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도덕이라는 관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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