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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Joker, 2019) 리뷰

Cogitation/Film Review

by Mr. Lazy 2020. 5. 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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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배제성>

출생에 대한 기록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기록도, 하다 못해 입고있는 의상의 브랜드도 없다. 조변인들에게 아서 플렉 혹은 해피, 같이 일하기 불편한 동료, Disorder를 가진 사람 정도의 존재로는 기억되겠지만, 주변인이 아닌 이상, 이 존재를 뒷받침 하는 자료라는 것은 없다. 따라서, 조변인들과의 관계를 배제시킨다는 가정 하에, 조커에게는 기조적 정보라는 것이 배제된다. 조커에 대한 해석은 이 정보의 배제를 기초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망상>

다크나이트에서 조커는 본인의 입 옆의 상처의 원인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제시하는데, 이야기 간에 서로 맥락이 맞지 않음에 그것을 망상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조커에서도 망상에 대한 부분은 충분히 제시되었으니, 신빙성 있을 듯 하다.) 조커에서 가진 망상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성과의 로맨스 였다면, 다크나이트에서 얘기하는 얘기하는 망상들은 흉터의 원인을 비정상(?) 적으로 들리는 주변 환경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얘기한다. 본인이 웃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져 입에 상처를 만든 가정 학대 상황 이라던가, 와이프가 병환으로 미소를 잃자,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상처를 만든 얘기라던가.. 포인트로 잡아야 할 점은 그 비정상(?) 적으로 보이는 망상이라던가, 환경이 아닌, 망상이 모두 ‘관계성’이라는 부분에 연관된다는 점이다.

본격적으로 조커가 되기 이전까지, 아서 플렉은 페니 플렉의 아들로서, 광대 사무소의 한 종업원으로서 타인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존재해왔다. 하지만 본격적인 조커의 모습에서 그는 스스로 본인을 관계성이라는 네트워크에서 배제시키게 된다. 조커라는 캐릭터가 망상을 통해 보려는 것은 본인이 배제시킨 사적인 관계성이라고 본다. 아동 학대를 당하는 본인의 망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또한 관계성이라는 점은 명백하니까.

광대라는 캐릭터가 선택되는 것은 이와는 별개로 공적인 관계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데, 광대라는 존재는 관람자와의 관계성을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 조커의 망상이라는 것이 Disorder에서 왔다면, 완성된 다크나이트에서의 조커가 관계성에 대한 여러가지 망상들을 풀어가는 것은 조커라는 큰 메시지와 공적 관계성을 위해 본인 스스로 배제시킨 사적 관계성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 싶다.

<메시지>

조커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뚜렷한 메시지는 한쪽의 편에 치우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편’이라는 개념 자체를 와해시키는 것에 있다고 본다. 기득권과 빈민, 주류와 비주류 등의 대립에서 즉정한 편이 아닌, 편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고 지 좋을대로 행동하는 빌런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조커는 기득권 층을 공격하고, 빈민층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일까?

조커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모습은 무정부 상태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혼돈의 모습이다. 조커에게 코미디란 그 혼돈의 장면들이고, 유머란 혼돈에 의해 벌어지는 일들이다. 혼돈을 불러오기 위해 조커에게 필요한 것은 형성된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인데, 가장 빠른 방법이 다크나이트에서 보여줬듯이 구조의 헤드를 자르고, 이를 이슈화 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기득권 층에 대한 공격을 행하는 모습은 조커 본인의 최후 목적을 위한 지름길로 택한 것이지, 빈민에 대한 옹호로 포장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혼돈에 대한 조커의 갈망을 본인이 느끼는 재미에서 기인한다. 조커가 몇 명의 사람이 죽던, 어떤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던 개의치 않고 배트맨과 맞딱드리려는 것 또한 그 재미라는 부분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재미의 정도에 있다. 만약 혼돈이 찾아온다면, 그 혼돈이 가장 혼란스러운 시점은, 완전한 혼돈으로 전환되기 직전 단계일 것이다. 혼돈이 완전히 도래한다면, 그 또한 하나의 질서질 되어버릴 테니까. 다크나이트의 시점이 바로 가장 혼란스러운 그 지점이 아니었을까.

<정당화>

다크나이트에서도 느꼈지만, 조커를 보고 다시 한번 느낀 것은 이 심오한 캐릭터가 잘못 해석 되었을 시점에서의 사회적 위험성이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조커는 빈민층 혹은 비주류를 옹호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빈민 혹은 비주류가 메인 일 수 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화에서도 대중이 선동되는 모습을 아주 단편적이면서도 정확하게 보여주는데, 이는 사회에 대한 조커의 스탠드업 코미디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스탠드업 코미디의 당위성은 조커의 최종목적을 위해 불가피한 부분일테고.

하나의 잘 포장된 사탕이 있다면, 사탕의 포장지를 벗겨 외관을 보고, 맛을 보아야 그 사탕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다. 아직까지 대다수가 사탕의 포장지만, 그 보다 적은 수가 내용물의 외관을 보고, 극소수가 그 내용물을 맛 본 후 평가를 한다. 조커라는 캐릭터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닌, 선과 악의 해체라는 부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조커는 선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악을 상징하는 것도 아닌, 조커라는 캐릭터 만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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