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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og, a dreamer, an old moon, and a sad song (개, 몽상가, 그믐달, 그리고 슬픈 노래)

Visual/Anarchistic Void

by Mr. Lazy 2020. 5. 13.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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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og, a dreamer, an old moon, and a sad song (개, 몽상가, 그믐달, 그리고 슬픈 노래) <121.2x145.4cm, Acrylic on panel, 2017>

Figures in textbook were dead. It was dead as much as rotten fishes throwing away from fish market. We measured the length, area, and volume from those dead figures, scattering all kinds of numbers, and formulas around its corpse. Existence of dotted line proves that figures are stuck in tridimensional hypothesis. It was a hypothesis in the name of education, and coercive perspective in the name of tridimensional hypothesis. Liberty was gone, and figures were dead under its coercion. So the dotted lines were removed. It was a rejection of the perspective which let us stuck in, forced, and made the figures dead. And it was a rejection of its validity.

Text always tightened brain. And text always hauled brain to particular direction. Brand had no choice but to follow like a dog before slaughter. Not an apple with surrealistic color, but a green apple from Magritte’s The listening Room was imagined when imagining an apple. Before that, an apple was imagined when imagining an apple. It was hard to imagine a crescent moon, or a guillotine without any purpose while imagining an apple. It is coercive custom of text. Rather to say it as old custom. So the text, and image were imperfectly separated. It was a rejection of text’s indexicability which hauled us, and tightened our brain in the name of custom, or old custom. And it was a rejection of its justice.

Anarchistic void does not have any physical, psychological, and intellectual feature, and rejects perspective, its validity, text’s indexicability, and its justice. In that way, Anarchistic Void is Anarchistic Void.

 

교과서에 실린 도형들은 죽은 도형들이었다. 수산시장에서 버려지는 썩은 생선만큼 죽은 도형이었다. 우리는 죽은 도형들의 시체를 놓고, 길이를 구하고, 넓이를 구하고, 부피를 구했다. 그 시체 위에 혹은 주변에 온갖 숫자와 공식들을 늘어놓으며.. 점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도형들이 3차원 적 가정에 갇혀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육이라는 명분을 위한 3차원적 가정이었고, 그 3차원적 가정을 위한 관점의 주입이었다. 그 안에 자유는 없었고, 그 폭력적인 관점에 도형들은 죽은 도형들이 되었다. 그래서 점선을 없앴다. 명분을 위해 가정에 갇히게 만든, 주입 시킨, 도형들을 죽인 그 관점에 대한 거부였다. 그리고 그 정당성에 대한 거부였다.

텍스트는 항상 뇌를 죄어왔다. 그리고 텍스트는 항상 특정한 방향으로 뇌를 이끌어갔다. 뇌는 복날 개 끌려가듯 다리를 질질 끌며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사과를 생각하면, 초현실적인 색의 사과가 아닌, 마그리트의 청강실에 나오는 푸른 사과가 떠올랐다. 아니 그 이전에, 사과를 생각하면 사과가 떠올랐다. 의도를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과를 생각하며 초승달을 떠올리거나 단두대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웠다. 텍스트에 의해 강요된 관습이다. 아니, 오히려 인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텍스트와 이미지를 불완전하게 분리했다. 관습 혹은 인습이라는 명분으로 뇌를 죄어왔던, 그리고 끌고 갔던 텍스트의 지시성에 대한 거부였다. 그리고 그 정의에 대한 거부였다.

무정부주의적 공간은 어떤 특정한 형상이나, 정신적, 지성적인 특징을 가지지 않으며, 관점, 정당성, 텍스트의 지시성, 그리고 정의를 거부한다. 그래서 무정부주의적 공간은 무정부주의적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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