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만 20211125
그러니까 보통의 경우에는 새로운 연인이 생기면 이전 연인에 대한 흔적들을 없애기 바쁜데, 관행적으로 벌어지는 이 행위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아마 24살 정도 즈음 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군대를 전역하고 대학교 교양 강의 중에 '문학과 인생'이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 교양 과목의 교수님은 매번 강의마다 특정 주제에 대한 A4 3장 이상의 본인 생각을 적어오라는 과제를 내주셨었고, 심지어 그걸 몇몇 학생들은 즉석해서 발표 및 토론을 하는 수업을 진행하셨어서, 괜한 교양 수업에서 낮은 학점으로 전체 평점 깎아먹을 각오가 아닌 이상 매주 A4 3장 이상의 생각을 적어야했고, 그 주제들은 대부분 '2010년의 관점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2010년의 관점에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등등의 정해진 답이 없는 주제였다. (그리고 그 A4 3장 이상을 적기 위해 꼭 특정 단편 문학이나 영화를 봐야하는건 덤이었다)
암튼 그 첫 수업에서 제시받은 주제가 '2010년의 관점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였고, 나는 그때 A4 3장에 걸쳐서 사랑이란 것은 결국 인간이 서로의 색을 가지고 만나면서 서로 섞이는 것인데, 헤어지고 나서도 본래의 색으로 돌아가진 못하고, 서로의 색이 어느정도 남은채로, 그 변색된 색이 본인의 색상이 되어 살아가다가, 또 누군가를 만나고, 또 헤어지고, 또 변색되고, 그런식으로 결국 검은색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글을 썼었고, 공교롭게도 그 다음 수업에서 발표 및 토론에 당첨되어 C동 8층 한 강의실에 있는 백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 앞에서 내 이론을 발표하고 토론하다가 '색상을 활용한 아주 좋은 표현을 했다. 어디에도 써먹을 수 있는 표현'이라는 별점 5개 중 4개 반 정도 되는 교수님의 극찬을 받는 경험까지 했었다.
결국 중요한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져서 흔적을 지운다해도, 그 흔적이라는건 나에게 남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 '어차피 그럴거 뭐하러 흔적을 지우나' 라는 의문이 생겼던거고,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흔적을 지우지 않고, 모든 흔적들을 어딘가에 전부 보관한 상태로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어떤 특정한 순간이나, 특정 인물을 회상하는 경우에, 나는 남겨둔 흔적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회상이 가능한데, 3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동거하다가 이제 곧 혼인신고를 앞둔 상황이 되다보니, 여태까지 동거를 했던 시점들이 회상이 됐고, 자연스럽게 처음으로 동거를 했던 상대가 떠올랐다.
포트만은 홍콩 사람인데, 본명은 따로 있었지만 나탈리 포트만을 좋아해서 영어 이름을 포트만으로 지었다고 했었다.
나보다 5살 연상이었는데, 워낙 동안이었어서 연상이라는걸 느끼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당시에 메이크업 아티스트 일을 하고 있었는데, 주로 결혼식 신부 화장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홍콩 재벌가 와이프가 외출 전에 메이크업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 받는 의뢰비가 신부 화장 10명 정도 금액을 합쳐야 될 정도인 경우도 있었고 뭐)
암튼 우연찮게 인연이 되어서 만난 포트만은 내가 CJ E&M 인턴을 하는 동안 한국에 와서 나와 신촌에 있는 주택형 게스트하우스에서 같이 살면서 연애를 시작했고, 인턴을 끝내고 번 돈으로 내가 홍콩으로 가서 다시 같이 지내다가, 내가 홍콩을 다녀오고서 취업을 하고 자취를 시작하기 시작한 몇 달 후부터 동거를 시작했었다.
사실 장거리 연애라는 것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편이라, 떨어져있는 기간 동안은 다른 사람을 만나도 서로 이해하기로 했었는데, 사람 일이라는게 꼭 가볍게 만난다고 해서 그게 꼭 가벼운 결론으로 이어지리란 법이 없으니, 인턴을 다녀오고 홍콩에서 지내다가 한국을 돌아오고나서부터 취업할 때 까지의 9개월이라는 기간동안 만났던 애들만 해도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였고, 중간 중간 포트만이 한국에 시간날 때마다 오면서 정리되는 관계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관계도 생겼던게 문제였던 것 같다.
결국 막상 동거를 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올 수록 나는 오히려 동거를 하기 싫어졌고, 부모님한테 독립운동가라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로 20살 부터 주장했던 '경제적 독립'이란게 막상 현실이 되다보니, 독립을 하면서 가지게되는 잔소리 없는 일상과 그 노이즈가 음소거된 일상을 매 주 다른 신음소리라는 노이즈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여건이라는 것을 꼭 동거를 하면서 없앨 필요는 없는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던거지.
근데 포트만은 이미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정리하면서 이민을 결심한 상황이었고, 나는 이도저도 결론을 못 내린 상태가 되버리면서 결국 포트만은 한국으로 왔고,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았고, 우리는 그렇게 동거를 시작했고, 내 인생의 첫번째 동거는 시작부터 이미 결론이 뻔히 보일 정도로 삐그덕 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정말 많이 싸웠다.
포트만은 정말 많이 울었고.
나는 '이럴거면 홍콩으로 돌아가' 라고 여러번 얘기했었고.
그럴때마다 포트만은 오열을 했었다.
그렇게 갈등이 심해질 때 마다 나는 '내가 더 잘해야지' 라는 생각보다는 '대체 언제 나가려나?' 라는 생각을 먼저 했었던 것 같다.
포트만은 여름부터 나와 동거를 시작했었는데, 벌써 겨울이 지나가면서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고, 우리는 정말 서로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신년 파티를 하러 홍대 떨파에 놀러갔다.
사실 그때까지 아리송했던건 나는 확실히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인 반면, 포트만이 어떤 입장이었는지 내가 알 수 없었다는 점이었고, 그래서였는지 나는 같이 놀러가서 혼자 술을 마시면서 돌아다니며 놀았고, 누가 포트만한테 추근대든 별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원래 술을 잘 못 마시기도 하지만, 술을 몇 잔 마신 포트만이 잔뜩 취해서 담배피던 나에게 왔는데, 볼이 발개진 상태로 너는 누가 나한테 추근대든 상관없냐고, 누가 나한테 부비대든 신경도 안 쓰는거냐면서 화를 냈고, 새해가 됐는데 넌 왜 나한테 해피 뉴이어 한마디 안해주냐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던 것 같다.
'포트만은 다시 잘해보고 싶었다'라는걸.
나는 포트만을 떨파에서 데리고 나와서 당시 홍대 놀이터 근처에 있던 예티라는 인도 음식점에 데리고 갔고, 우리는 거기서 인도 뮤비를 보면서, 커리와 난을 먹으면서, 술을 한잔 더 하면서, 다시 잘해보자라는 얘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잘해보고 해피엔딩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잖아.
그 일이 있고 1-2주 지나서 다시 갈등이 시작됐고, 나는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고, 그걸 알았는지 포트만은 어느 날 짐을 싸더니 신촌에 월세방 하나를 구했다고 하며 나갈거라고 했고, 합정역 근처에 면세점에서 일자리도 구했다고 했다.
당시에 늘어나는 중국인 관광객들 덕분에 홍대 근처에 무수하게 면세점이 늘어나던 시기였는데, 그 면세점 중에 김 파는 상점에서 중국인 상대로 일을 하기 시작하기로 한거지. (포트만은 광동어가 모국어지만,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전에 중국과 무역을 했던 경험이 있었어서 만다린도 가능했었다)
그렇게 반년 정도 만에 내 첫 동거는 끝이 났는데, 그게 포트만과의 정리는 아니었다.
포트만이 짐을 싸서 나가는데, 짐이 무거워보여서 내가 차로 데려다줬고, 그 짐을 옮겨주고 정리하는걸 도와줬는데, 포트만은 계속 울었고, 나도 눈물이 나와서 우리는 짐을 다 옮기고 몸을 다시 섞게 되버렸다.
그게 시작이 돼서 우리는 별거를 하면서도 매주 주말마다 만나서 몸을 섞었고, 결국 별거는 하지만 인연이라는건 유지하기로 했었는데, 덕분에 면세점에서 같이 일하면서 포트만한테 추근대던 놈들이 나를 질투했던 일도 있었고, 그 중 질투가 과해진 중국 놈이 백인 글래머로 둔갑한 페이스북 가짜 계정으로 나한테 말을 걸어서 속마음을 캐가 그걸 포트만한테 고자질 하는 등 별별 일들이 다 있었지.
사실 포트만과 정작 어떻게 정리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결국 별거하면서 서로 매주 몸을 섞다가, 그 몸 섞임으로 생겼던 정이라는게 면역이 생기면서 서로 소홀해지고, 그러면서 차츰 정리가 됐겠지.
아니면 내가 포트만과 동거를 하는 와중에도 포트만이 나가기만을 기다리던 관계들이 영향을 준 탓도 있었겠고.
지금 여자친구와 동거를 하다가 혼인신고를 앞두기 까지 8번의 동거를 했었다.
그리고 매번 동거가 끝나는 시점이 되면 포트만이 떠오르곤 했었고.
최근에는 인스타에 알만한 계정이라고 포트만이 뜨던데,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다시 시작한 것 같고, MAC 이라는 브랜드 프로모션을 하는지 이것저것 해당 브랜드 제품으로 메이크업을 한 샘플 사진들을 올리곤 하는 것 같았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그때 내가 마음을 잡고 포트만이랑 정말 다시 잘해봤다면, 그래서 계속 동거를 이어가고, 결국 결혼까지 준비하고 있었다면, 과연 우리는 행복했을까? 아니, 나는 행복했을까? 후회하지 않았을까?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