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또마떼구다사이 20211124
그러니까, 내가 21살 때 였다.
21살 때의 나는 한창 머리를 기르고 있었고, 그 일이 벌어졌던 날에 분명히 나는 그 당시 자주 입고 다니던 루즈한 NBA 후디 조끼 안에 루즈하면서 두꺼운 후디 맨투맨을 입었었고, 스키니진과 흰색 질샌더 하이탑 슈즈를 신고 있었던게 기억이 난다.
당시에 나는 유나라는 여자친구를 만나고 있었는데, 유나가 인덕원 근처에 사는 탓에 범계, 평촌으로 놀러가는 일이 많았고, 그렇게 놀러갔다가 돌아올 때면 가끔 금정역에서 1호선을 타고 신도림까지 와서 신도림에서 2호선을 갈아타고 홍대로 가서 집으로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오늘 적을 얘기는 내가 신도림 역에서 1호선 하차 후 2호선을 갈아타러 가기 전에 발생했던 일이었다.
그 날 나는 술을 조금 마시긴 했었는데, 유나가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니었으니, 그냥 저녁 먹으면서 반주 정도를 했었겠고, 당연하게 저녁을 먹고 번화가를 돌아다니다가 근처에서 눈에 잡히는 DVD 방에 들어가서 해야할 것을 하고 나와서 집으로 향했을테니, 술에 취한 상황은 아니었고, 술이 다 깬 것도 아닌, 오히려 술기운이 살짝 있다가 DVD 방에서 살짝 깨고 나온, 맨정신도 아니고, 취한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애매한 정도 였을거다.
그런 애매한 상태로 환승을 하려고 1호선 열차에서 내렸고, 항상 1번 아니면 10번 열차에 타는 습관 때문에 나는 환승하러 내려가는 계단까지 정거장 플랫폼을 좀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막차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유독 내리는 사람이 없었고, 누가 봐도 노숙자로 보이는 한 분이 환승계단까지 가는 정거장 플랫폼 중간 쯤에 있었다.
환승계단까지 가려면 어쨌든 그 노숙자를 지나쳐야 했는데, 별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가던 내 팔뚝을 그 노숙자가 건드렸고, 그래서 그 분 얼굴을 보니 나에게 말을하는 것 같아보였고, 그래서 이어폰을 빼니 확실히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노숙자는 본인 얘기를 좀 들어달라고 했고, 그 분이 하는 얘기와 함께 강렬한 소주 스멜이 전달되기도 했다.
결국 취한 노숙자였는데, 취한 노숙자가 하는 얘기라고 해봐야 신세 한탄, 사회 비판, 그리고 알 수 없는 옹알거림 같은 것 들이니, 그와 같겠거니 라고 생각했으나, 그 뻔한 레파토리를 얘기하는데도 관심을 끄는 한마디가 있었다.
'나도 잘 될 수 있었는데, 사회는 기회를 안줬어! 조또마떼구다사이란 말이야! 조또마떼구다사이! 조또마떼구다사이!'
그렇게 조또마떼구다사이를 외치면서 그 노숙자는 정거장 플래폼 한 가운데에 벌러덩 누웠고, 아마도 술에 취해 잠드는 것 같아서 나는 그 분을 지나 환승계단을 내려와서, 홍대로 가는 2호선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갔었는데, 몇가지 생각이 들어서 그 분의 조또마떼구다사이가 계속 생각나는 듯 했다.
정말 사회가 기회를 안 준걸까?
아니면 본인이 스스로 차버린걸까?
아니면 기회라는건 애초에 제공이 되는걸까?
아니면 기회조차 만들어야 하는걸까?
기회가 제공이 된다면 그건 공평하게 제공되야 하는걸까?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면, 동등한 기회를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동등한 기회를 만들 배경을 만들어주는게 사회의 역할인걸까?
기회가 공평하게 제공이 된다면, 그 결말 또한 공평해야 하는걸까?
등등.
어떤 식으로 방향을 잡고 가지를 쳐도 결국 '공평'이라는 단어와 맞물려서 생각이 이어졌는데, 결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막상 정해진 것은 없고,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논리가 있는 방향성이 있는 반면,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하겠지만 확실한 논리가 있는 방향성도 있을테고, 누군가에게는 공평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불공평일 수도 있고, 결국 뭘 어떻게 생각해봐도 공평이라는 것은 정의는 무엇인가의 정의는 정의내릴 수 없다는 식의 결론처럼 허무하게 그냥 현 상황에서는 그 정도에서 멈출 주제였다.
근데 그걸 소주제로 놓고 대주제로 넘어가면 '왜 공평해야 할까?' 라는 질문이 나오게 되는데, 이 질문은 공평이 어떻게 정의되느냐에 무관하게, 왜 그것이 필요한지에 대한 목적성에 대한 부분인거라, 그냥 공평이란걸 빼고 '그래서 -가 왜 필요한가요?'라는 질문이란게 되고, 이 문장의 '-가' 부분을 본인이 정의내리는 공평이라는 것으로 채운다고 해도, '그건 니 생각이고' 라는 식으로 부정이 가능할 정도로 사적목적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테니,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끊임없는 담론으로 이어지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애초에 필요할 이유가 없다는거다.
21살에 만났던 조또마떼구다사이 노숙자에게서 얻은 경험이란건 결국 이거였고, 그 후로 내가 홀대를 받으면 그럴 이유가 있겠거니, 환대를 받으면 그럴 이유가 있겠거니 라는 생각부터 하게되니, 결론적으로는 내가 어떻느냐에 따라 세상이 날 차별적으로 대우한다는게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세상이 문제라는 개념이 사라져버린거다.
갑질과 관련된 글들을 볼 때마다 그 조또마떼구다사이 노숙자가 생각이 난다.
갑질 할 위치니까 갑질을 하겠지.
그러고보면 파시즘이 강력하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