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gitation/Long

할아버지 20211115

Mr. Lazy 2021. 11. 15. 15:14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글쎄,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오히려 부모보다 애틋함이 느껴지는 조부모와의 관계도 나오고 그러는데, 나는 그런 기억은 없는 것 같다. 

갑자기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나는건, 오늘이 할아버지 기일이기 때문인데, 2016년에 돌아가셨으니, 올해로 돌아가신지 만 5년이 되셨고, 정작 기일에 대한 기억도 나지 않았다가 아버지가 할머니와 같이 있는 사진을 보내주면서 오늘 할아버지 기일이라고 얘기해주신걸로 알아챈걸 보면 확실히 나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장례식에 참석을 못했던 이유인데, 장례식 당시에 나는 이란 테헤란에 출장을 가있었고, 당시 출장 가있는데 괜히 신경쓰지 말라는 이유로 부모님이 나에게 얘기를 안해주셨던 탓에 나는 서둘러 귀국을 하는게 아니라, 할아버지 돌아가신 것도 모른 상태로 거래처와 샤프란과 버터의 향긋함이 베어있는 밥에 양고기를 쳐먹으면서 거래처에 물건 하나 더 팔려고 하루종일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기일이 되면, 이란 테헤란이 떠오르는건 어쩔 수 없는 연상작용일거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성공적인 자식 양육을 위해서는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무관심과 할아버지의 재력이 필요하다는. 

내 케이스는 오히려 아빠의 정보력과 엄마의 보살핌과 할아버지의 무관심이었던 것 같다. 

지금와서 가장 의문이 드는건 '과연 할아버지는 정말 관심이 없었을까?' 라는 부분인데, 정작 나도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크게 떠오르는 것들이 없다는건 '나부터 크게 관심이 없지 않았던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오히려 들기도 하고, 서로 떨어져 살았다면 모르지만, 같이 살았던 기간이 9년 정도인데, '그렇게 서로 관심이 없었던게 맞을까?' 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하는데, 제일 먼저 기억나는건 동보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 학교를 다녀오면 할아버지가 '라면 하나 삶아줄까?'라고 하셨었고, 나는 좋다고 하고 라면을 하나씩 먹었는데,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때 매일 먹던 라면 하나씩이 내 어린시절을 비만으로 보내는데 큰 역할을 하는 시발점이 됐을거라는 추측이 들긴 한다. 

그렇게 라면을 삶아주시고 할아버지는 노인정으로 향하시곤 했는데, 노인정으로 간다는건 가서 화투를 치거나, 동네 할아버지들이랑 술을 한잔 드신다는 의미였고, 할머니는 과거에 흔히 보이던 '보험 아줌마'이셔서 집에 잘 안 계셨으니,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쌀가게는 내가 지켜야하는 그런 상황들이 연출되곤 했다. 

그렇게 매일 쌀가게 마루에서 숙제를 하다가 쌀 배달 요청으로 어른이 오면, 나는 할아버지 노인정에 계신다고 얘기를 했고, 그러면 그 분이 노인정에 가서 할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을 얘기하고 값을 치뤘고, 할아버지는 노인정에서 돌아와서 자전거에 쌀을 실어 배달을 가셨다가 빈 자전거를 타고 다시 돌아와서 자전거를 세워두시고 다시 노인정으로 향하곤 하셨다. 

쌀가게 이전에는 다른 가게도 하셨다고 하는데, 정확히 뭘 하셨는지 들었던 기억은 없고,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는 돈을 벌기위해 사우디에 건설을 하러 파견을 가셨었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국민학교 다니고,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 그러셨다고 했는데, 꽤나 긴 시간 동안 사우디에 계셨다가 꽤나 큰 돈을 가지고 돌아오셨었는데, 그 꽤나 컸던 돈이 장사를 하면서 불어나는게 아니라 까먹는게 더 많았던 것 같고, 결국에 그 까먹는 돈들을 아버지 월급, 어머니 월급으로 막았었다가, 결국 남아버린 빚이라는건 아버지가 사업을 하면서 다 처리하셨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돈을 잘 벌거나, 잘 운영하시는 분은 아니셨던거다. 

그런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도 '면'을 세우는건 참 강한 분이셨던 것 같은데, 언제나 셔츠를 입고 계셨고, 쌀 배달을 할 때도 셔츠를 입고 하셨고, 노인정 가서 화투를 칠 때도, 동네 할배들이랑 술 한잔을 기울이실 때도 셔츠를 입으셨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빵모자를 쓰셨었다.)

그러다가 쌀가게를 그만두고, 바로 길건너에 있던 미군부대에서 다른 일을 하셨었는데, 정확하게 무슨일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군에서 배식 후 남은 스파게티나 레이션 등을 집에 가져오셨고, 당시에는 워낙 못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던 동네였던 탓에 미군에서 그런 음식물을 보급해주듯이 나눠주는 일들이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배정 1순위는 미군 부대 내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이었으니, 당시에 할아버지가 들고왔던 싱싱한(?) 미군 음식들은 당시에 상당히 구하기 힘들고, 맛있는 것 들이었다. 

암튼 그런 동네에서 살다가, 내가 9살 이었을 때 우리는 서울 성산동이라는 곳의 한 빌라 반지하로 도망치듯 이사를 왔고, 그때부터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적은 없었다. 

다만 매주 주말이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러 그 먼 동네로 가야한다는 의무사항이 생겼었는데, 매번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그 길을 차를 타고 가다보면 나는 항상 멀미에 속이 뒤집어져서 토를 했었고, 그렇게 괴로운 매주를 겪음에도 우리가 매주 보러 가야한다는 의무사항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때 내가 살았던, 그리고 여전히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집은 물이 흐르는 하천 바로 옆에 있었는데, 비가 매우 강하게 내리치던 어느 해에 대한민국 곳곳에서 수해가 났었고, 하천 옆에 살고 계시던 두 분은 자연스럽게 수해민이 되어서 대문이었던 큰 유리창이 깨진 집에서 간이침대를 놓고 얼마간 지내시다가 이리저리 기회가 되는대로 이사를 가셨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만 해도 소래포구, 온양, 제주도, 춘천이니 참 많이도 옮겨 다니셨고,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가장 활기차 보이셨던 곳이 제주도였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때 수험생이었던 이유로 제주도에 가지 않아서 그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제일 활기가 넘쳤던건 맘껏 낚시를 할 수 있는 환경이었어서 그랬다고 한다.)

춘천에 가시기 전까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여러가지 이유로 정착을 못하셨었는데, 결국 춘천에서 정착을 하셨고, 그렇게 춘천에 계시면서 점점 할아버지는 거동을 못하시더니 간병인이 없으면 못 지낼 정도가 되셨고, 그러다가 사시던 집 근처 요양원에 들어가서 얼마간 안 좋았다가, 얼마간 괜찮아졌다가 이런 사이클을 몇년 동안 반복하시면서 어느날 새벽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런 말년을 보내셨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한창 건강이 안 좋아지셨을 때 침대에서 내 눈을 보면서 막상 이름을 잘 기억 못하시다가 결국 내 이름을 1분에 걸쳐 기억해내셨던 모습이었는데, 정작 그렇게 말년이시면서도 잡은 손아귀에 준 힘은 투박하면서도 강했다. 

할아버지는 고혈압도 있으셨고, 당뇨도 있으셨는데, 내가 어렸을 때는 동네마다 '야매 아줌마'가 한분씩 돌아다녔고, 그 면허도 없을법한 야매 아줌마한테서 조금 더 싼 가격에 그 고혈압과 당뇨를 다스리는 모습을 봤었는데, 이것저것 알수 없는 약물을 주사하는 것은 기본이고, 가끔은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어떤 알 수 없는 치료를 하기도 했었다. 

할아버지는 그 시대의 사람 치고는 나름 장수하셨다는 생각이 드는데, 과연 그 야매 아줌마한테서 괜한 치료를 안 받으셨으면 좀 더 살아계셨을 수 있지 않았을까? 몇일이라도 더, 내가 출장 다녀올 때 까지는 계실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쎄.

앞으로도 매년 11월 15일이 되면 정작 할아버지 기일인건 기억을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남겨진 기억이 많지도 않거니와, 앞으로 남길 기억들에 챙길 사람이 더 많으니까. 

그래도 매년 내가 할아버지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장손이 장례를 알지도 못했었다는 찝찝함이라는건 아마 항상 남아있을 것 같고, 그런 찝찝함이라는게 할아버지가 본인을 기억해달라고 남기신 것일지,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서 내가 느끼는 것일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보고싶은건가?

그건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