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선택 (Advantageous, 2015) 리뷰
미국 버클리에서 태어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과 베트남인 혈통의 혼혈인 여성 감독. 한국계 여성 배우인 재클린 킴 주연.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노숙자 여성, 건물 테러를 한 듯 보이게 잠시 등장하는 어린 여성. 경제 불황으로 인해 매춘을 하는 어린 여성들이 많이 발생한다는 우려스러운 뉴스. 직업을 잃은 여성. 그리고 그녀의 딸. 그리고 그녀의 딸을 사회 주류에 편입시키기 위한 직업 잃은 여성의 행위들. 사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그 ‘여성’이라는 단어에 연결시킬 미끼들을 많이 던지고 있고, 많은 리뷰들이 이 미끼를 물어버린 채로 짜여진 판처럼 이 단어와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차별, 불평등, 억압 등의 클리셰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려내기도 한다. 우려지고 우려져도 애초에 맛에 깊이가 없었기에 유지되는 맛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 인스타 맛집의 유지 비결과 같은 이런 현상 자체도 이미 너무 클리셰스러워서 굳이 지적할 부분은 아니지만, 정작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확한 시간의 설정은 없지만, 영화는 가까운 미래 시점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싱글맘의 스토리를 중심으로 잡고 있으며, 시간적 시점이 미래라는 점, 홀로그램을 이용한 광고를 활용한다는 점, 과학 기술이 좀 더 발전했다는 점 외에는 현재 시점과 배경에 큰 차이는 없는 듯 하다. 여전히 도시는 성장률을 중심으로 발전의 척도를 잡고 있으며, 가시성은 없는 사회 계급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진입장벽은 여전히 인맥과 경제적 능력에 기반을 잡고 있다. 그리고 성형에 대한 수요가 현재와 같이 높은 듯 하다. 그웬은 해당 시점을 살아가는 싱글맘이며, 성형의 대안으로 다른 신체에 본인의 기억을 주입하는 형태의 수술을 홍보하는 법인의 이미지 모델로 일을 하다 최근에 회사가 홍보 타겟을 젊은 세대로 바꾸면서 이미지에 맞지 않는 이유로 실직을 한 상태다. 딸의 학업 능력이 출중하여 엘리트 공립학교에 입학 원서를 보냈으나 불합격했고, 어떻게든 딸을 상위 계급에 포함시키기 위해 큰 돈을 들여 엘리트 사립학교에라도 입학 시키려는 상황이다. 다만 문제는 실직한 상태에서 돈을 구할 방법이 많지 않다는 것.
결국 본인이 근무했던 회사에서 홍보하는, 성형의 대안책이라는, 본인의 기억을 다른 젋은 여성의 신체에 주입하는 수술을 임상실험하는 모델이 되겠다는 선택을 하고, 여기서 해당 수술의 비밀에 대해 듣게된다. 수술을 통해 주입되는 기억은 A 항아리에 있는 물(A’)을 B 항아리로 옮기는 개념이 아닌, A 항아리에 있는 물(A’)을 복제한 A’’라는 물을 B 항아리에 넣는다는 것. 즉, A’라는 기억은 소멸된다는, 곧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웬은 비밀을 알았음에도 선택을 하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해당 회사는 성형의 대안책을 통해 매출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웬의 기억이 복사되었으나, 정작 그웬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다른 신체는 수술 후의 신체적 여파와 마치 모성애를 잃은 듯한 모습들로 딸과 갈등을 보이다가, 결국 서로 협의점을 찾고 살아간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에서의 핵심은 바로 이 수술, 그리고 결과물, 그웬의 기억이 복사되었으나, 정작 그웬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이 다른 신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부분이고, 이를 모성애와 연결하여 꽤나 명확하게 풀어내고 있다. 사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이 이 ‘이원론’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에 열을 올리기도 했었고, 그런 많은 철학자들의 노력이 무의미하게 보일 정도로 무지몽매하게 본인이 이원론을 얘기한다는 인지조차 없이 신체와 영혼을 들먹이는 이들이 있지만, 영화에서 이 이원론에 대한 부정과 일원론에 대한 증명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 바로 이 모성애라는 것이다. 일원론 관점으로 보자면 그웬과 그웬의 기억을 복제하여 전송한 신체는 다른 존재다. 다만 그웬의 시작이 백지였다면, 복제물 그웬의 시작은 낙서된 백지였다는 차이 정도랄까? 영화에서의 복제 기술은 그 정밀도가 완전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 일원론에 대한 뒷받침이 되기도 한다. 그웬이 복제되면서 그녀가 상실한 것들은 감각과 관련된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그녀의 취향이라던가, 습관이라던가, 모성애라던가.
Jackson Pollock의 액션 페인팅을 예로 들어보자면, 같은 시점의 평행우주에서 캔버스를 앞에 둔 Jackson Pollock이 그려내는 작품이라는 것은 다를 것이다. 만약 비슷하게 보이는 작품이라 해도, 더 높은 정밀도로 작품을 뜯어본다면 오차라는게 존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작품을 그려내는 것이 단순히 작가와 캔버스 그리고 소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작업실 대기의 미세한 흐름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모든 자잘한 환경들이 결과물에 대한 변수가 되어버린다. 인간의 인지, 기억 그리고 감각이라는 것도 이와 같다. 미세한 변수들이 작용이 우리의 인지, 기억 그리고 감각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등장하는 복제 기술은 이 미세한 변수들까지 온전하게 복제하지는 못하는 상태이다. 기술의 불완전성이 복제물의 감각을 상이하게 형성했고, 상이한 감각이 모성애를 상실하게 했으며, 그 상실된 모성애가 일원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등장인물들은 복제물이 그웬이 아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웬의 기억이 낙서된 시점에서 출발한 그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예전에 작가들과의 토론에서 이런 질문을 해봤던 적이 있다. ‘만약 나노 단위 미만까지 정밀하게, 색감은 물론 붓터치의 질감 하나하나까지 포함하여, 빈센트 반 고흐의 ‘Starry Night’을 복사할 수 있는 3D 프린터가 있고, 그 프린터로 해당 작품을 복제한다면, 그 작품은 원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저 질문에 등장하는 초정밀 프린터가 등장하는 시대라면 알아서 토론이 진행되겠지만, 현재로서는 답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일원론이 부정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일지 모르겠지만.